기독교면려청년회의 창립

1881년 2월 둘째주일,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의 윌리스톤 회중교회에서 기독교면려청년회의 창립예배가 드려졌다. 이 교회 담임목사인 E.F. 클라크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이 운동은 연합기독면려회(The United of Chirstian Endeavor)로 명명되어 빠른 속도로 미국 전역과 캐나다, 영국, 유럽, 아시아권으로 파급되고 오늘의 남선교회의 씨앗이 먼 이국땅에서 태동되는 순간이다. 

한국의 면려운동

안대선(W.J Anderson) 선교사는 한국의 면려운동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1890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917년 미국북장로회의 파송으로 부인 L.E Beede 여사와 함께 한국에 와서 먼저 안동선교부에서 일하며 영주, 의성, 예천, 청송 등을 순회하며 면려정신을 심었고, 1922년 서울선교부로 전임되어 전국연합회의 창립작업을 주도했다.

기독청년 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

마침내 1924년 12월 2일~5일 서울 피어선 성경학원 대강당에서 기독청년 면려회 조선연합회 창립총회 및 제1회 전국조선인대회가 개최되어 남선교회전국연합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초대회장 박현식, 총무 안대선)

남선교회의 약사
  • 1924. 12.2~5

    창립총회 이후 7회

  • 1949. 7. 7

    재건총회 이후 9회

  • 1958. 5. 27

    장년, 청년, 학생면려회로 분립 이후 65회 창립년수: 98주년(2022년 현재) 총회횟수: 81회기(2022년 현재)

본회 명칭변경 과정
  •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1924년 창립)
  •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청년면려회 전국연합회(1949년 재건 및 개칭)
  • 대한예수교장로회 장년면려회(1958년 3분(청년, 장년, 학생면려회) 분립 및 개칭)
  •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신도회 전국연합회(1963년 교단총회에서 개칭)
  • 대한예수교장로회 남전도회 전국연합회(1977년 교단총회에서 개칭)
  • 대한예수교장로회 남선교회전국연합회(1979년 교단총회에서 개칭)
조찬기도회의 시작

서울노회연합회 제12회 총회를 계기로 3개 노회(서울ㆍ서울동ㆍ서울서)로 분립하면서 상호유대를 지속하기 위하여 노회협의회에서는 그 첫사업으로 매월 조찬기도회를 갖기로 하여 처음에는 3개 노회만 참여하기로 했으나 강남의 경기노회가 참여를 희망하며 매월 1회씩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순번적으로 갖기로 했다. 당시 서울, 경기지역에는 강북의 3개 노회와 한수이남의 1개 노회 등 4개노회였다. 따라서 조찬기도회는 재경노회가 공동으로 추진하고 후일 재건된 이북 4개 노회(현 5개 노회)가 참여하여 오늘의 재경노회연합회 조찬기도회로 발전하게 된다. 1970년 5월 9일 역사적인 첫 조찬기도회가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김이봉 목사(서울서, 동성교회)를 강사로 열려 47년간 지속되어 553회(2022. 2. 15) 조찬기도회까지 이르게 된다. 또한 권역별 정례기도회를 부ㆍ울ㆍ경지역 2010년 6월 5일 부산 소정교회, 대구ㆍ경북지역 2010년 7월 31일 대구남덕교회, 제주지역 2016년 6월 25일 제광교회, 전남동부지역(순천, 순천남, 순서, 여수) 2016년 6월 28일 한소망교회, 전북지역 2016년 7월 2일 전성교회, 광주ㆍ전남서남부지역(전남, 광주, 광주동, 목포, 땅끝) 2016년 7월 16일 송정제일교회에서 첫 시작으로 정례기도회를 진행 중에 있다.

남선교회주일

1968년 9월 교단 제53회 총회에서 3월 둘째주일을 평신도주일로 제정하였고, 오는 2022년 3월 15일 제54회 남선교회주일로 지켜 전국교회가 남선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봉헌하며 남선교회 정체성을 확립하고 재정적인 기반을 갖게 되는 중요한 사업이다.

회개, 용서, 화해운동의 
전개

1928년 7월 연희전문학교에서 제1회 여름수련회를 갖고 전국 10개 지역에서 1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경연구, 특강, 토론, 사경회로 진행되었고 토론주제는 금주, 단연, 애국에 대한 것이다. 면려회는 창립 당시부터 금주, 금연운동에 관심을 갖고 전도차원에서 전개된 금주금연운동이 애국적인 차원의 사회운동으로 발전하고 그 후 경건ㆍ절제운동과 생명ㆍ정의ㆍ평화운동으로 그 정신이 계승되어 온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금주ㆍ금연운동은 물산장려ㆍ야학운동으로 확산되어 사치품 제한, 국산품 애용, 저축장려 등 범사회운동으로 추진하였으며 또한 창립70주년 기념사업으로 경건ㆍ절제운동, 창립80주년 기념사업으로 물질만능 시대에 창조질서의 회복을 주제로 생명ㆍ정의ㆍ평화(L.J.P)운동을 주창하였고 범교계와 범사회운동으로 10년간 추진하였으며 또한 행동강령을 남선교회 회원들의 생활지침으로 마련하여 실천 중에 있다.

평신도신문

1965년 평신도의 소리란 제호로 제1호가 발간되고 평신도란 이름으로 발간하다 1973년 제22호 발행으로 중지되었다가 1977년 11월 2일 등록번호 라2255호로 “평신도회보”로 창간되어 오늘의 “평신도신문”으로 이어져 본회 발전과 문서선교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며 69회기 중 대대적 개편을 통하여 신문으로서의 본격적 역할과 기능에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다.

평신도교육대학원

평신도교육대학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1988년 2월 20일 첫 운영위원회를 열고 운영위원장에 정연택 장로, 교무위원장에 목사계속교육원장인 고용수 교수를 선임하고 원장에 김윤식 목사를 추대했다. 마침내 1988년 3월 8일 장신대강당에서 역사적인 입학식을 가짐으로 평신도교육대학원이 시작되어 본회 교육사업으로 크게 공헌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동문 및 재학생(33기, 34기)이 2,000여명에 이른다.

평남선교회

남선교회는 1987년 4월 눈부신 성장에 따라 기독교회관의 9평의 사무실이 비좁아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2층으로 이전했고 이 곳도 좁아 회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당시 회장 계준혁 장로는 회관문제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마침 기독교회관 신관건축이 구체화되어 기독교연합회관에 한층을 투자하기로 결의하고 먼저 헌금을 한 후 회장단, 임원, 증경회장 순으로 모금을 시작했고 지노회연합회가 분담하며 신태영 장로를 사무총장으로 위촉하여 1992년 12월 4일 202평 지분을 확보하고 입주 감사예배를 드리고 기독교연합회관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이제 그 정신을 이어받아 창립 8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연합회관 1개층 갖기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결의한 바 있으며 2022년 1월 현재 282.43 평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남선교회 사무실과 평신도신문사, 평신도교육대학원 용도 등으로 117평을 사용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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